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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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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

2023.09.14 ~ 202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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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회고전을 보러 덕수궁에 왔다 입장료 천원은 별도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결제한 후 방문했다

관람료는 2천원, QR을 찍고 입장하면 됨

 

 

 

 

첫 시작은 '첫 번째 고백'

장욱진의 학창시절 ~ 중장년기까지의 작품이 모여 있는 곳

10~20대의 청년기에는 흑백과 갈색의 모노톤을 사용했고 30~40대에 이르며 명도와 채도의 대비로

시각적 주목도를 높이는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40~50대인 중년기에는 뼈대나 윤곽 조형으로 기호화되거나 물감층을 반복적으로 쌓은 까칠한 질감의 마티에르는

원근법적 공간을 삭제해버리기도 하는 반추상과 순수추상화를 그렸지만,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형상을 살리는 그림으로 다시 변했다고.

 

 

 

 

자화상

한국전쟁 이후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장욱진이 종군화가로 활동하던 중 고향인 충남 연기군에 잠시 머물며 그린 그림.

붉은 길 위에 콧수염이 그려진 남자가 장욱진 자신이라고.

 

 

 

 

 

 

 

 

 

 

 

반월,목

이 작품은 장욱진이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업에 매달려 있을 무렵 제작한 것이라고

화면 위쪽에 푸른 반달이 있고 아래는 '목'이라는 한자로 변형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이프로 물감을 덧칠해 두텁게 쌓아 올린 이 작품은 형태의 구상성을 잃지 않으면서 사물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며

구상과 추상을 결합하려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또 서명을 ucchin, chang에서 ucchin, c로 바꾸며 상징적 변화를 추구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고백 - 발상과 방법: 모든 것은 하나다>를 보러 2층으로 올라왔다

장욱진은 평생 몇 개의 한정된 소재만을 그렸다고 하는데, 까치 나무 해 달이 그 대표적인 모티브이다.

이 모티브를 통해 결국 모든 것은 하나임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이 상징적 소재들은 장욱진의 그림 속에서 자유롭게 변주하는 걸 보는게 포인트!

그리고 제한된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똑같은 그림은 단 한 점도 없다는 것으로

조형적 완결성을 얼마나 치열히 추구했는지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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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

화면을 채운 둥근 나무 속 까치 한 마리가 있다

그 뒤로 푸른 초승달도 있는데 모든 대상은 원근법과 비례를 무시한 채 평면적으로 표현했다.

캔버스에 검은 물감을 바른 뒤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 내 자연스러운 질감을 만들어내었다고.

 

 

 

 

나무

1987~88년 사이 그려진 장욱진의 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둥근 형태의 나무.

이 시기 장욱진은 기관지 천식과 고혈압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둥근 나무 양옆의 초가집과 기와집은 가족의 보금자리로 이때의 작품에는 가족에 대한 걱정과 애틋함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나무가 중심이고 좌우로 집을 배치해 대칭을 이루고 대각선으로 초승달과 새가 교차하는 구도와

색감으로 평면적 그림이지만 생동감을 준다.

 

 

 

 

 

 

 

 

 

 

 

 

<세 번째 고백_진진묘>

"참으로 진실된 아름다움" 진진묘는 장욱진의 불교 관련 작품인 동시에 가족에 대한 이야기.

장욱진 아내 이순경 여사의 법명이 진진묘라고.

그는 상념이 떠오를 때마다 금강경을 읽던 아내의 모습을 보다 영감을 받아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여 진진묘를 완성했다고 한다.

동물을 그릴 때도 동물 가족의 모습으로 표현하던 그의 따뜻한 가족애가 느껴지는 섹션.

 

 

 

 

 

가족

이 그림은 장욱진이 항상 머리맡에 걸어둘만큼 애착을 가졌는데

1964년 첫 개인전에서 일본인에서 판매된 뒤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어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 몇몇만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던 작품.

당시 한일경제 교류 협력단으로 한국에 왔던 시오자오 사다오라는 사람이 여러번 장욱진에게 찾아와 그림을 구매하고자 하였고

처음에는 판매할 마음이 없었지만 그의 정성에 돈을 받고 판 첫 작품이었다고 한다.

그 돈으로 막내딸의 바이올린을 사주었고

1990년 장욱진은 세상을 떠나 1년 뒤 유족들은 1주기를 맞이해 열리는 전시회에서 이 가족도를 빌려오고 싶어했지만

소장가는 병색이 짙어 병원에 있었고, 그의 아들은 그 그림을 본 적이 없다는 답에 무산으로 돌아갔다.

그 후 30여 년이 흘러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가 직접 나서 여러번의 편지와 메일 끝에 소장가의 가족을 만났고

소장가의 아뜰리에로 그의 아들은 안내해주었다고 한다.

전기도 없는 어두운 2층 다락방에 먼지를 뒤집어 쓴 여러 작품들이 있었고, 그 다락방 구석 낡은 벽장 안 모서리에 꽂힌

장욱진의 가족도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후 작품 수복팀에서 응급보존처리를 마쳐 이번 전시를 통해 공개할 수 있었다고

 

 

 

 

 

 

 

 

 

<네 번째 고백_ 내 마음으로서 그리는 그림>

평생 남긴 유화 730여점 중 580점은 마지막 15년 동안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4전시실에서는 1970년대 이후 작고까지의 장욱진 노년기 작품이 정리되어 있다고.

이 시기 그는 동일한 소재와 대상을 사용하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 더 절제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또한 민담이나 고사 같은 한국적 소재를 나타내고 고구려 고분 벽화나 조선시대 민화를 연상시키는 화법이 보여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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